칼럼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위자료청구소송 요건과 의미는 2025-03-11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위자료청구소송 요건과 의미는

 

 

1. 혼인빙자간음죄의 폐지와 성적 자기결정권

 

과거 우리 형법에는 이른바 ‘혼인빙자간음죄’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 규정에 관하여 잘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혼인빙자간음죄란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서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입니다. 하지만 이 규정은 2009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의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간혹 이 규정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을 보호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지만, 사실 혼인빙자간음죄의 위헌 폐지는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가부장적 성 이데올로기에 구속되어 남성의 사생활을 형법으로 규제하고, 여성에 대해서는 남성에 비해 열등한 지위를 강요하는 것으로 성평등의 이념에 비추어 보면 명백히 위헌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본 죄의 보호 대상은 ‘부녀’ 그것도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였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는 달리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보호 대상으로만 취급하였고,

그마저도 음행의 상습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보호 대상에 포함될 수도, 제외될 수도 있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본 규정은 오히려 남성과 여성 모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약간 다른 의미에서, 혼인빙자간음죄가 폐지된 현 시점에서도 사적인 만남과 성적인 관계가 법률의 테두리 밖에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상간소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처럼,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형법상 범죄가 되는 강간이나 강제추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민사상 위자료청구권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2. 성적자기결정권침해 위자료청구의 근거

 

누구나 사람이라면 성적 자기결정권을 갖습니다.

자유로운 의사 판단 아래 자신이 누구와 연애를 하고 혼인을 할 것이며, 성적 관계를 가질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하며, 이 과정에 누군가가 부당하게 개입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혼인빙자간음죄는 폐지되었으므로 남성이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을 하고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성별을 불문하고 타인을 기망하여 상대방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불법행위로서 손해배상책임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혼인빙자간음죄는 ‘혼인을 빙자하였다는 것’에서 보호대상의 보호법익을 침해한다고 본 형법상의 규정이었지만,

현대 사회의 통상적인 가치관은 과거와는 달리 혼인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자유로운 성적 자기결정권 하에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으므로 현 시점에서의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를 이와 같은 판단 기준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혼인을 할 생각이 없이 결혼을 약속하며 성적 관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처벌 대상이나 위자료청구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자유로운 성적 관계와 혼인이 허용될 수 없는 기혼자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본인이 기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유부남 또는 유부녀라는 사실을 속인 채 만남을 가졌다면,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자유로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한 것이나 다름없을 뿐더러, 상간소송의 공포에도 시달리게 되는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법원은 위자료청구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인 사람에게 상대방의 혼인 여부는 만남의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으니, 이를 기망한 것은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손해배상책임을 발생시킨다는 것입니다.

 



 

3. 위자료를 받기 위한 승소의 요건

 

그렇다면 성적자기결정권침해 위자료청구소송을 통하여 정당한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할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일단 상대방은 기혼자여야 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본인은 미혼 상태여야 합니다.

스스로도 기혼자라면 이는 단순히 불륜관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본인 스스로도 자유로운 성적 관계가 허용되지 않은 유부녀 또는 유부남인 이상 상대방의 혼인사실 기망이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였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방이 본인의 기혼사실을 숨기고 기망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혼인사실의 기망은 때로는 매우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이뤄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도 마땅히 알려야 할 내용을 회피하면서 알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혹 혼인사실의 기망에 대해서 반드시 적극적이고 명시적인 기망행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일회성 만남에서 적극적으로 고지하지 않았다고 하여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가 된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마치 유부남 또는 유부녀가 아닌 것처럼 행세하였다면 충분히 인정될 수 있으므로 주저하지 마시고 정확한 상담을 받아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흔히 퍼져 있는 오해 중 하나는 유부남 또는 유부녀인 사실을 알고 나서도 만남을 중단하지 않았다면 성적자기결정권침해 위자료청구소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알고 난 뒤에 만남을 중단하지 않았다면 상간소송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상대방 배우자의 권리를 침해하였기 때문에 손해배상책임이 생기는 것뿐이지, 알고 난 뒤에도 만났다고 해서 본 소송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알고 난 뒤 만난 기간과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원인 등에 따라서 위자료가 크게 줄어들 수는 있으므로,

당연히 상대방이 기혼자임을 알았다면 관계를 즉각 종료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설령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소송이 가능할 수 있으므로 역시 정확한 상담을 받아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4. 성적자기결정권 침해소송, 단순한 금전 청구 이상의 의미

 

성적자기결정권침해 위자료청구소송은 단순히 금전적인 배상을 받기 위한 소송만은 아닙니다.

위자료청구소송에서 금전배상은 단지 배상이 금전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나타나는 결과일 뿐,

본 소송의 진정한 의미는 상대방의 기망행위에 대해 명확한 책임을 묻고 억울함을 푸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소송을 제기하여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게 되면,

오히려 시간이 지난 뒤 상대방의 배우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상간소송까지 제기할 수 있으므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엇이 잘못되었고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를 법적으로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거짓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 분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송이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계신 분들도 많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희망하신다면, 금전으로 위자료를 받는 것이 모든 상처를 덮을 수는 없겠지만 소송을 철저히 진행하다 보면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리실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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